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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따라잡기] Jobs vs. Gates 2 라운드! (34)…아이폰, 사용자 편리성과 우수한 성능으로 급부상

2006년 스티브 잡스는 회사이름을 '애플 컴퓨터'에서 '애플'로 바꾸는 결단을 내렸다. 그 뿌리가 컴퓨터였지만 잡스는 미래를 내다보는 생각으로 회사명을 바꿨다. 이 때만 해도 사람들은 iPod 의 인기에 힘입은 이름 바꾸기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듬해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그 인기와 헤일로 효과는 모든 애플 제품에 영향을 미쳤다. iPod 성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애플 대세론이 등장했고 디지털 소비자 가전 업체로서의 애플의 위상이 새롭게 정의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제품의 디자인에서부터 제조 포장 유통에 이르기까지 수직적으로 통합관리되는 애플 시스템의 재발견이었다. 하지만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다. 미디어 뿐만 아니라 월스트리트 전문가 그리고 경쟁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아이폰의 인기를 '찾잔 속의 돌풍'이라며 깎아내리기 바빴다. 정작 아이폰을 상대할 경쟁 제품은 전무했다. 스마트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사용자 편리성과 우수한 성능 측면에서 아이폰을 상대할 제품은 전무했다. 모바일 스마트폰 시장의 흐름을 아이폰 혼자 바꾸는 양상이었다. 애플과 아이폰에 대한 거부감은 사실 90년대 초반부터 디지털 세상을 평정해온 마이크로소프트(MS)에 길든 결과로 보는 게 맞다. MS 윈도즈 프레임에 갇힌 좁은 시야가 이유였다. 혁신과 새로움이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15년 넘게 길들어져 온 MS 프레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컴퓨터 여명기를 주도했고 컴퓨터 업계를 좌지우지해온 두 사람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다시 한번 누구의 경영 철학이 옳은가를 놓고 대결상을 보이는 듯했다. 이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 전략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MS의 아성은 전세계 90%가 넘어가는 PC 시장을 지배하는 힘에서 나온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PC시장은 15년 넘게 연평균 15%이상의 성장 가도를 유지해왔다. 때문에 컴퓨터 시장에선 MS가 손만 대면 황금으로 변한다는 설이 실체적 믿음처럼 굳어졌고 MS 종속변수는 나날이 높아만 졌다. MS, 편리·디자인 인식 전무 MS의 성공전략에 빼놓을 수 없는 게 가격전략이다. 기본적으로 MS의 경쟁력은 소프트웨어 판매에서 창출됐다. MS는 컴퓨터제조사들과 독점적 OEM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있다. 이에 따라 컴퓨터 제조사는 만들어지는 모든 컴퓨터에 MS 번틀소프트웨어 운영체제와 오피스 등의 애플리케이션을 묶음으로 탑재해 판매해왔다. 경쟁 소프트웨어 회사 제품이 껴들어 갈 틈이 없었고 이것이야말로 숨겨진 노예계약이었다. 일반 소비자들이 원하는 소프트웨어를 구매하고 싶어도 이미 컴퓨터에 따라오는 번들 웨어 때문에 구매욕구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MS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성공한 회사가 아니라 경쟁사의 시장진입을 원천봉쇄하는 방법으로 디지털 세상을 주물러왔다.또 소비자를 대상으로 사업을 벌인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커스토머는 하드웨어 제조사들이었고 소비자는 컴퓨터 가격에 책정된 MS 소프트웨어 가격을 생각도 못하면서 지불해왔다. 바로 '윈도즈 세금'이었다. 따라서 좋은 제품을 만들어 팔자는 기본적인 철학이 없었기 때문에 사용자 편리성과 창조적 디자인에 대한 인식은 전무했다. 하드웨어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던 MS가 상관할 바 아니었다. 바로 MS 가 주창해온 수평적 관리 경영법의 대성공이었다. MS가 가만 있어도 윈도스 소프트웨어는 무조건 하나씩 탑재됐다. 더 중요하게는 하드웨어 제조사가 별반 차이 없는 제품과 가격 경쟁으로 서로 피를 흘리는 상황에서도 MS는 탑재되는 윈도즈 번들 소프트웨어로 돈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런 방치전략이 결국 자신들에게 독이 되는 상황을 인식하기 까진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했다. 아이폰 성공에 따른 애플의 약진이 눈에 보이자 MS가 고작 한다는 것은 윈도즈 컴퓨터가 더 싸다는 광고였다. 한쪽에서 사용자 편리성과 하드웨어의 우수성 디자인의 창조성을 주장하며 소비자 가슴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오는데 방어하는 쪽은 그저 '우리가 더 싸다'는 식의 광고만 뿌리고 있었다. MS가 사실 창조적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다. 윈도즈 CE는 모바일 운영체제의 시조였고 태블릿 PC 역시 2000년대 초반부터 빌 게이츠 직접 시도한 야심작이었다. 하지만 둘다 사용자 편리성에서 낙제점이었고 태블릿 PC 부서는 아예 MS에서 사라져버렸다. 또 애플 아이팟의 성공을 따라잡기 위해 Zune을 런칭했지만 역시 대실패로 기록됐다. MS로서는 그나마 게임 콘솔 Xbox로 위안을 삼아야했지만 그것도 대량 불량사태로 손해보는 장사를 해야했다. 여기에 구글을 쫓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퍼부은 검색엔진 사업을 펼쳤지만 지금까지도 벌 소득이 없다. 결국 MS는 소프트웨어로 벌어들인 돈으로 사업확장을 손만 대면 모두 실패하는 형국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PC 시장은 마이너스 성장을 보였고 최근에서야 다시 성장세를 보이지만 수익성은 아직도 요원하다. 이유는 한가지 애플의 약진 때문이다. 애플, 주기적 업그레이드 지원 이런 상황이 전개되면서 소비자들은 새로운 진실에 눈을 떴다. MS와 하드웨어 제조사들의 사업 전략은 주기적인 업그레이드였다. 소비자와 사용자들은 컴퓨터를 구매하기 시작하면서 항상 업그레이드의 압박과 유혹을 받아왔다. 더 좋은 성능 더 높은 파워 그리고 더 빨라진 속도를 주장하며 신제품을 내놓는 MS와 신형 컴퓨터가 구매사이클을 이어왔지만 어느덧 소비자들은 더이상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됐다. 최악의 상황은 윈도즈 비스타가 선을 보였을 때였다. 이미 발전할 대로 발전한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MS는 또다시 업그레이드를 주도하기 위해 비스타를 선뵀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제 소비자들은 자신들이 컴퓨터 제조사와 MS에 의해 불필요한 업그레이드를 강요받아왔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융위기에 따른 불경기는 컴퓨터 제조사와 MS에 상상할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그 타격을 인정하기 전에 이들은 부정하기에 바빴다. 또 전문가 미디어 그룹은 시장유지를 위해서도 MS의 아성이 건재함을 설파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 시장이 아닌 모바일 시장을 새롭게 주도하고 있었다. 또 컴퓨터 시장에서의 애플 전략은 고급스런 디자인과 저전력 저사양 부품을 기반으로 사용자 만족도를 제고한 제품으로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동안 MS가 주창해온 수평적 관리 모델의 한계가 드러났고 잡스와 게이츠의 끝나지 않은 라이벌 관계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블로그 www.jpthefreenfuse.com

2012-05-17

[스티브 잡스 따라잡기] 노이스와 그루버의 결합체 '스티브 잡스'

"실리콘 밸리의 아버지"가 누구냐는 질문에 IT 역사가들은 주저 없이 봅 노이스 박사를 꼽는다. MIT 물리학 박사출신으로 1957년 지금의 실리콘 밸리에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를 세웠고 이후 고든 무어와 함께 '인텔(Intel'69)'을 창업한 IT업계의 전설이다. 노이스 박사는 지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품 또한 빼어나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연구개발을 최우선시하는 경영법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는 직원들을 벤처창업의 길로 이끌어준 테크월드의 진정한 리더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인텔이 존재하기까진 노이스 박사와 그 오른팔이었던 앤디 그루버 부사장 없이는 불가능 했다. 그루버는 노이스 박사 만큼 명석한 엔지니어였으나 동시에 인격적으로는 그의 대척점이었다. 천사 같은 노이스 박사와 막가파 규율부장 그루버가 존재했기 때문에 직원들은 공포감 속에서 피땀 흘린 창조물을 끊임없이 생산했다. 스티브 잡스는 노이스와 그루버의 결합체였다. '굿 잡스'는 화려한 언변에 희망과 비젼을 이야기하는 매력 넘치는 불세출의 리더였고 '배드 잡스'는 공포의 겁박과 유치한 고집으로 똘똘 뭉친 인간말종이었다. 직원들을 상대로한 잡스의 막말 고문과 학대는 애플시절부터 유명했다. 그를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나가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받은 사람만 해도 한 다스다. 최초 매킨토시 운영체제 밑그림을 그렸던 천재 프로그래머 제프 러스킨은 잡스의 학대를 이겨내지 못하고 회사를 떠났다. 꼭 잡스 때문은 아니었지만 심약했던 러스킨은 80년대 후반 정신질환을 앓게 됐다. 약물치료를 받고 상태가 호전됐던 그는 91년 어느 날 잡스의 집을 찾아가 돌을 집어던져 수십 장의 유리창을 부숴놓고 만다. 맑은 정신에서도 구원을 잊지 못했던 것일까. 반면 잡스로부터 3번의 고용과 해고를 겪었던 홍보 전문가 앤디 커닝햄. 노스웨스턴출신의 수재 커닝햄은 매킨토시 출시를 앞두고 홍보담당으로 애플에 입성했으나 변덕쟁이 잡스에게 해고됐다. 수년이 흘러 그녀는 넥스트에서 입사와 다시 해고를 당했고 2001년 이아팟 출시를 위해 애플에 복귀했지만 또 다시 해고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하지만 최고의 경영자를 상대한 경력 덕분인지 그녀는 지금 실리콘 벨리 최고의 홍보전문회사 CXO 커뮤니케이션 CEO다. 커닝햄은 잡스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곁에 있으면 참을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 무엇이든 새로 시작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이 현실처럼 다가온다.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다. 세상을 세번이나 바꾼 사람인데…그가 또 날 부르면 다시 찾아갈 것이다." 자아 도취적인 경영인의 이중잣대와 흑백논리는 직원들에겐 정말 참을 수 없는 고역이다. 이런 성격에 대해 정신분석가들은 스티브 잡스가 양자로 자라났기 때문이란 말을 즐겨한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길러진 자신에 대해 일그러진 자존심을 갖게 되고 사람을 믿기 어려운 상태에 빠진다는 흔한 영화 같은 이야기가 잡스에겐 그럴듯하게 어울린다. 실제 잡스는 14살에 자신이 양자였단 사실을 알게 됐다. 젊은 날 왜 자신이 생부모에게 버림 받았나를 놓고 몹시 고민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82년 그는 사설탐정을 고용해 자신을 버렸던 생모의 소식을 접했다. 생모는 자신을 양자로 보낸뒤 생부와 재결합해 여동생까지 뒀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자신의 운명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것인지에 대해 친구들에게 술을 먹고 토로했던 적도 있다고. 하지만 그는 넥스트를 운영하면서 생모를 대면했고 여동생 모나 심슨이 촉망받는 미국의 젊은 작가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86년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잡스는 생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슬퍼했다. 이때부터 잡스는 가족에 대한 생각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내 자식이 아니라고 거부했던 딸 리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91년 그는 로렌 파웰이란 스탠퍼드 MBA 졸업생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잡스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강연을 했다. 연설이라면 존 F 케네디와 빌리 그래함을 뺨칠 정도로 타고난 재주꾼 잡스다. 헌데 그가 연설도중 말을 더듬질 않나 이어갈 내용을 잊어버리기까지 하면서 정신을 못 차렸다. 이유는 잡스의 연설 도우미였던 미모의 금발 대학원생 로렌 때문이었다. 잡스는 손까지 떨고 있었다. 어설프게 연설을 끝내고 자신의 차로 향하던 잡스는 갑자기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회사일을 돌보고 있어야 하나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해야할까"란 생각을 떠올렸다고 한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로렌을 찾아낸 그는 무작정 저녁식사를 함께하자고 요청했다. 두 사람의 로맨스는 이렇게 시작됐다. 잡스에게 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로렌은 잡스에게 존재하지 않는 반쪽을 갖고 태어난 여자였다. 그가 갖지 못한 신중함 조용함 내면의 강인함 등. 그리고 잡스가 가장 힘든 시기에 그를 지켜준 사람이었다. 아이비리그 출신이며 스탠퍼드 MBA 소유자였던 로렌은 이미 메릴 린치 골드먼삭스 등 내로라하는 증권사의 펀드 매니저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녀는 메이저 리그보다 마이너리그를 더 원했다. 불우한 환경의 학생들을 도와 대학진학을 돕는 사회사업에 더 관심을 가졌고 잡스 처럼 채식주의자였다. 그러면서도 회사 경영에 대해 잡스만큼 성공을 위한 전략적 마인드도 갖고 있었다. 균형잡힌 시각과 지적 우아미가 그녀의 무기였고 잡스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2년 후 잡스는 첫 아들을 임신한 로렌과 결혼했다. 게다가 리사까지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천방지축 잡스에서 성숙한 패밀리맨 잡스로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었다. 넥스트와 픽사의 중첩되는 재정난으로 파산 일보직전까지 몰렸던 잡스는 인생 최악의 해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를 버티게 해준 것은 바로 가족이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굿 잡스'가 상황돌파를 리드해주고 있었다. 픽사를 팔아치우려고 했지만 "좀더 버텨보라"는 조용한 조언을 해준 게 바로 로렌이었다. 결국 픽사는 95년 겨울 '토이 스토리'를 개봉하면서 잡스에게 달콤한 결실을 가져다 줬다. 실리콘 밸리의 록스타로 잡스가 부활한 순간이였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잡스의 운명은 전혀 또 다른 세계로 향하고 있었다. 14년전 존 스컬리와 맞장 대결을 펼치다 쫓겨난 애플 컴퓨터 이사회의장. 똑같은 장소에 그가 초대손님으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2011-07-29

[스티브 잡스 따라잡기] '토이스토리' 등 10년간 64억달러 흥행 대박

95년 겨울 '토이 스토리'의 흥행성공과 픽사의 기업공개는 스티브 잡스가 컴퓨터 혁명을 가져온 신세대 경영인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CEO 반열에 진입하는 1단계 도약의 관문이었다. 실리콘 밸리의 황태자였던 잡스는 넥스트 컴퓨터의 경영실패로 테크월드에서 그 이름이 사라지는가 했지만 만화영화를 통해 할리웃 황태자로의 반전드라마를 창출했다. 하지만 "더이상 공짜는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애플 컴퓨터의 공동창업주였던 잡스는 이미 나스닥 상장을 통해 20대 백만장자란 소리를 들었지만 30대중반에 접어들면서 1억달러에 달했던 개인재산중 8000만달러를 탕진하며 거덜나기 일보직전까지 몰렸다. 뿐만아니라 넥스트와 픽사 두 회사를 경영하면서 보여준 잡스의 리더쉽과 판단력은 언론의 도마위에 오르기에 충분했다. 하늘아래 나뿐이 없다는 식의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던 잡스가 좌절과 패배의 쓴잔을 들이키며 내적인 성숙기를 가졌던 것도 이때였다. 컴퓨터 판매 위해 디즈니 방문 89년 여름 잡스는 처음으로 디즈니사를 방문했다. 물론 컴퓨터 애니메이션회사 픽사를 등에 업고 넥스트 컴퓨터를 판매하기 위한 전략적 미팅이었다. 이날 버뱅크 디즈니 스튜디오 미팅에 등장한 사람은 제프리 카잔버그 수석부사장과 마이클 아이즈너 회장. 전세계 영화계를 움직이는 두 거물이었다. 디즈니로서는 실리콘밸리의 황태로 알려진 잡스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지만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관심이었다. 이날 잡스는 넥스트에서 방금 출시한 두종류의 컴퓨터를 들고 왔다. 하나는 업무용 컴퓨터 모델에 흑백모니터를 붙였고 다른 하나는 그래픽 전문 컴퓨터로 컬러 모니터를 장착했다. 잡스는 할리웃 최고의 권력자 두사람을 향해 특유의 완벽 프레젠테이션을 펼치면서 영화산업의 미래가 자신의 그래픽 컴퓨터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잡스의 열띤 설명이 끝나자 카잔버그가 일어나 컴퓨터 앞으로 다가왔다. 흑백모니터를 가리키며 "업무용 컴퓨터는 천대 정도 사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컬러 모니터 컴퓨터를 보며 "이것은 아티스트용이다." 날카로운 눈매의 카잔버그는 잡스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애니메이션은 내것이다. 이에 대한 어떤 도전도 용납할 수 없다." 실리콘 밸리의 황태자가 잡스였다면 당시 할리우드 황태자는 제프리 카잔버그. 두 사람 모두 독재자형 리더였고 결코 어울리 수 없는 같은류의 사람들이었다. 심한 모욕을 느낀 잡스였지만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89년은 잡스에게 분기점의 해였다. 넥스트 운영체제를 라이센스화하자는 IBM의 제의를 말도안되는 이유로 거부한 잡스였다. IBM은 잡스에게 계약금만 6000만달러를 제의했다. 독점도 아니었다. 이같은 소문이 나돌자 컴팩과 델 컴퓨터까지 잡스에게 줄을 섰다. 컴퓨터 업계 천하통일을 이룬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즈 95 운영체제가 발표되기 6년전의 일이었다. 이때 잡스가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면 마이크로소프트는 절대로 오날날의 회사가 될 수 없었다. 잡스의 오판으로 결국 넥스트는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픽사 역시 깨진독에 물붓기식으로 재정이 악화됐다. 이유는 잡스 때문이었다. 인수할때는 40여명의 단촐한 직원이었지만 픽사의 그래픽 이미징 하드웨어를 메디컬 특수 컴퓨터로 고가에 팔겠다며 마구잡이식으로 직원을 늘려 130여명으로 몸집을 불렸다. 하지만 89년 한해 1000만달러의 적자를 기록하고 말았다. 픽사, 기업공개 후 주가 급등 기회를 날린 것도 잡스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도 잡스. 하지만 그는 최악의 상황이 몰려오고 있음에도 "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존심 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93년 '토이스토리'의 하청 계약을 위해 디즈니와 두번째 미팅에서 잡스는 다시한번 놀림을 당했다. "토이스토리" 제작비가 얼마냐는 카잔버그의 질문에 잡스는 최소 2200만달러가 든다고 말했다. 카잔버그는 "1700만달러를 맞추지 못하면 집에 돌아가라"고 말했다. 극장수입 12.5% 의계약서를 받아든 잡스는 "이것만해도 다행"이란 생각이었지만 알고보니 디즈니의 장편애니메이션 평균 제작비는 3000만달러였다. 픽사의 사업모델은 "애니메이션 아티스트와 컴퓨터 테크놀러지의 결합"이었다. 디즈니는 애초 "토이 스토리"에 극력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수백명의 손으로 작업하는 애니메이터들의 회사인데 컴퓨터에 밥그릇을 빼앗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즈너회장의 신속한 결정으로 "토이스토리"가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자 잡스는 절대 기회를 놓칠수 없었다. 그가 95년 봄 픽사의 상장을 기획했을때 모두가 반대했다. 가능성이 제로였기 때문이었다. 상장의 전제조건은 조직화된 회사가 일정기간 영업이익을 내야한다. 5000만달러의 적자 회사 픽사의 상장 계획은 누가봐도 코미디였다. 헌데 95년 여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웹브라우져 회사 넷스케이프가 단 한번도 수익을 낸적이 없는 회사로 월가 사상 처음으로 상장에 성공한 것이다. 사실 이것은 '닷컴 버블'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잡스는 "그것봐라"하면서 고집을 꺽지 않았다. '토이스토리'가 개봉되고 흥행대박을 예고했다. 1주일 뒤 픽사 경영진과 잡스 그리고 증권회사 브로커가 모였다. 오전 7시를 기해 픽사의 기업공개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긴장한 브로커는 픽사의 운영상태를 감안해 주당 12-14달러에 주식거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잡스는 22달러여야한다고 고집했다. 순전히 배짱이었다. 아무리 옆에서 말려도 잡스의 고집을 꺾을 사람은 없었다. 주사위가 던져진 순간 순식간에 22달러로 거래가 시작된 픽사주식은 47달러까지 치고 올라갔다. 대박이었고 잡스가 옳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픽사와 잡스의 성공에는 다음과 같은 이론이 성립된다. 9년동안 개인돈 5000만달러를 쏟아부우면서도 끝까지 픽사를 포기하지 않았던 잡스의 집념. 모든 전문가들이 불가능하다는 픽사의 기업공개를 고집한 뚝심. 마지막으로 할리웃 생태계를 꿰뚫어본 통찰력. 잡스는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확신했고 디즈니에 없는 픽사의 애니메이션 감독 존 레세터를 믿었다. '토이스토리'의 성공에 이어 '벅스라이프' '토이스토리 2 & 3' '파인딩 네모' '인크레더블스' 'Wall-E' 등등 픽사는 만드는 작품마다 기록적인 성공을 이어갔다. 2006년까지 픽사는 10년동안 64억달러에 달하는 전대미문의 흥행수익을 기록하면서 할리우드 최고의 스튜디오로 등극했다. 반면 디즈니를 떠나 스필버그와 스튜디오를 차린 카잔버그는 한때 할리웃의 황태자였지만 픽사에 필적할 작품은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잡스는 "할리웃은 이제 내것이야"라고 웃고 있었다.

2011-07-15

[스티브 잡스 따라잡기] "잡스에게 투자한 것 후회한다" 비난 쏟아져

픽사.넥스트 잇단 적자 천방지축 스티브 잡스가 90년대를 맞이했을때 그는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을 걷어찬 애플에 대한 복수심으로 넥스트(NeXT)를 세우고 조지 루카스로부터 컴퓨터 애니메이션 회사인 픽사(Pixar)를 인수했던 잡스였지만 두 회사 모두 성공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넥스트의 설립 목적은 워크스테이션급 교육용 컴퓨터 개발. 잡스는 수많은 대학 관계자들로부터 2000달러 정도의 컴퓨터여야만 구매가능하다는 조언을 들었다. 하지만 88년 개발이 완료 됐을때 넥스트 컴퓨터의 소비자 가격은 6500달러. 여기에 2000달러짜리 프린터는 별도였다. 잡스는 소형 워크스테이션을 요구하는 기업과 특수전문가 회사를 찾아 나섰다. 유닉스 기반의 혁신적이고 사용하기 쉬운 GUI운영체제 넥스트 Step이 포함됐고 개인용 워크스트이션급 컴퓨터이니 당연히 가격을 제대로 받아야한다는 생각이었다. 실제 넥스트의 하드웨어와 시스템 소프트웨어(운영체제)는 잡스의 장인정신이 담긴 제품답게 테크업계가 놀랄만한 창조적인 최신 기술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컴퓨터 주류시장에는 이미 사용하기 복잡해도 쓸만한 저렴한 제품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소수의 잡스 추종세력에게 넥스트 컴퓨터는 전설과도 같은 창조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 주류시장을 파고들기에는 턱 없는 가격이었다. 7년동안 판매된 넥스트 컴퓨터는 겨우 5만대. 넥스트 컴퓨터의 뛰어난 성능 때문에 CIA와 월스트릿 증권가에 공급하는 성과도 있었지만 회사 재정을 도울만한 실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투자자였던 로스 페롯은 한 TV인터뷰에 출연해 "잡스에 관한 TV 다큐멘터리를 보고 짝사랑을 키웠는데 그에게 투자한 것을 후회한다"고까지 말했다. 3억 달러가 넘어가는 넥스트 자본금을 거의 말아먹은 상황에 대한 회한이란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빌 게이츠의 유명세 93년 잡스는 넥스트 직원 500명 중 절반을 내보내야했다. 또 "최고의 제품을 디자인하겠다"던 자신의 꿈을 접고 하드웨어 부서를 없앴다. 넥스트에서 개발한 운영체제 사업부만 꾸려가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그 역시 잘 될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넥스트의 실패가 자명해지면서 실리컨 벨리의 아이돌스타 스티브 잡스의 명성도 서서히 사라져가는 판국이었다. 그의 자리를 대신해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유명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잡스의 이름이 언론을 탔던 이유는 그가 조지 루카스로부터 사들인 픽사 때문이었다. 존 레세테의 등장 원래 그래픽 컴퓨터 전문회사로 시작했던 픽사였지만 86년 잡스가 인수할 당시 존 레세터란 에니메니션 프로듀서가 혼자힘으로 회사의 명맥을 이었다. 일본 만화계의 대부 데즈카 오사무를 존경하던 레세터는 디즈니에서 새로운 만화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결국 해고 당했다. 컴퓨터 에니메이션의 미래를 확신했던 레세터는 픽사에 새둥지를 틀고 자신이 원했던 에니메이션에 꿈을 태웠다. 그가 처음 만든 2분18초짜리 단편 'Luxor Jr.'는 할리웃 사상 최초의 컴퓨터 그래픽 만화영화였다. 상상을 뛰어 넘는 '귀여운 이미지'의 레세터 작품은 86년 아카데미상 단편만화부문 후보에까지 오르며 세상을 놀래켰다. 이후 레세터는 열악한 제작여건 속에서도 컴퓨터 애니메이션 장르를 개척했다. 88년 4분짜리 'Tin Toy'가 아카데미상 단편만화 최우수상을 수상하자 레세터와 잡스의 이름이 할리웃을 휩쓸었다. 계속되는 재정난 하지만 픽사 역시 돈먹는 하마였다. 픽사의 시도는 할리웃과 테크업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수익모델은 여전히 요원했고 잡스는 적자운영을 떼우기 위해 자신의 개인자금까지 털어 넣고 있었다. 90년 봄 잡스는 픽사 의 하드웨어 분야를 비아콤(Viacom)에 매각해버린다. 회사의 그래픽 컴퓨터 기술로 한몫 잡으려했던 잡스는 만화제작 인원들만 남기고 엔지니어들 모두 내보냈다. 또 픽사를 어떻게든 다른 회사에 합병시키려했다. 그 중 마이크로소프트가 관심을 보였지만 인수결정을 마지막에 포기했다. 장편 만화 제작비가 없어 단편에만 매달려오던 픽사에 92년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월트 디즈니의 제프리 카잔버그였다. 당시 최고의 만화제작자로 명성을 날리던 카잔버그가 픽사의 가능성을 염두하고 장편만화 제작을 협의하려던 시도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와 디즈니의 마이클 아이즈너 회장 사이에서 파워게임이 시작되면 픽사와의 진행사업도 모두 중단됐다. 아이즈너는 80년대초 절박한 위기의 디즈니 대표로 취임해 회사를 반전시킨 할리웃 최고의 거물. 그는 혁신경영기법으로 디즈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고 카잔버그와 손 잡고 '미녀와 야수''알라딘'그리고 '라이언 킹' 등 잇달은 블록버스터 히트작을 제작해 제 2의 월트 디즈니 부흥기를 가져온 장본인이다. 아이즈너의 오른팔이었던 카잔버그는 자신의 유명세가 정점에 오르자 더 많은 권한을 원했다. 하지만 카리스마의 지도자형인 아이즈너는 카잔버그가 만화에만 몰두하길 바랬다. 결국 카잔버그는 디즈니를 박차고 나가 스티븐 스필버그와 손잡고 드림웍스 SKG를 세워 디즈니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다시 찾아온 기회 다급해진 아이즈너는 카잔버그에게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선수를 쳐야만했다. 스티브 잡스의 픽사 5년 동안 3편의 장편영화 제작을 계약하자며 2500만 달러의 거금을 제의했다. 넥스트를 절반으로 줄이고 픽사를 팔아치우려던 잡스에게 갑자기 하늘로부터 호박이 덩쿨째 떨어진 사건이었다. 덧붙여 할리웃 초특급 거물 아이즈너는 스스로 자기집에 호랑이를 불러들이고 말았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다.

2011-06-17

[스티브 잡스 따라잡기-8] 'Jobsless Apple'

Jobsless Apple 스티브 잡스가 NeXT와 Pixar라는 두 회사를 붙잡고 인생 역전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사이 잡스없는 애플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란 질문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잡스가 공식적으로 애플을 떠난 해는 86년. 되돌아온 해는 97년. 이 10년 사이 지구촌엔 전방위적인 '디지털 쓰나미'가 몰려왔다. 애플 신화를 모방한 무수한 벤처 기술 업체들의 거품과 신데렐라 성공 스토리가 펼쳐졌고 사업가와 소비자 모두 컴퓨터 세상을 환영했다. 컴퓨터는 불완전했지만 무한한 잠재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기 충분했다. 빌 게이츠 등장 천하평정 쳐다만 봐도 겁나는 컴퓨터를 자녀를 위해 할 수 없이 사야만 했던 부모들이 있었고 또 컴퓨터 학원과 길거리 PC Shop이 넘쳐났다. 1000-2000달러의 컴퓨터를 구입하긴 했지만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이유도 모르고 또 업그레이드를 해야만 했다. 툭하면 먹통으로 변하는 컴퓨터를 보면서도 사람들은 "컴퓨터는 원래 그런거야"라는 시대정신을 만들어냈다. 컴퓨터는 초유의 스피드로 완전히 새로운 시장과 경제 사이클을 만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윈도즈라는 운영체제 하나로 천하를 평정했다. 전세계 90%이상의 컴퓨터에 마이크로소프트 운영체제가 작동했고 컴퓨터 관련 소프트웨어 하드웨어는 모두 "윈도즈 호환"이란 반짝이는 딱지가 붙었다. 여기서 잡스가 애플에 계속있었다면 아니 잡스의 코가 1센티만 낮았더라면 이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빌 게이츠의 시장을 내다보는 탁월한 비전과 성공 노력을 폄하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가정속에서 잡스 없는 애플이 얼마나 허망하게 세월을 낭비했는가를 엿 볼 수 있다. 76년 애플(Apple) II와 84년 매킨토시는 세상을 선도하는 컴퓨터였고 애플은 컴퓨터 선도 기업이란 자랑스런 브랜드 가치를 축적할 수 있었다. 모두 스티브 잡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잡스가 매킨토시 개발에 매진한 80년대 초 애플 이사회와 경영진은 회사가 좀더 상장기업답게 성숙한 회사로 거듭나야한다고 믿었다. 이런 기조는 결국 잡스와의 결별을 예고한 것과 다름없었으며 애플이 애플스러움을 포기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애플 경영진은 잡스에게 매킨토시 개발만 관여하게 했지 애플의 마케팅 전략과 가격 정책 등에서 완전히 배제시켰다. 경쟁사 컴퓨터보다 10년이나 앞선 가히 혁명적인 매킨토시를 손에 거머쥔 애플 경영진은 걱정할 게 없었다. 하지만 잡스는 매킨토시만으로 컴퓨터 시장을 장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킨토시와 함께 디지털 시장을 주도할 미래 전략을 세웠었다. 잡스는 당시 모든 가정마다 컴퓨터를 보유하는 날이 이뤄지는 꿈을 가졌었지만 컴퓨터 사업이 잘되기 위해선 업무용이 먼저란 결론을 내렸다. 그는 매킨토시와 짝을 이룰 "Mac Office"를 계획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가 나오기 6년 전의 일이다. 또 업무 환경내에서 네트워크 기능을 가능케 해주는 "Apple Talk" 개발을 서둘렀다. 당시로서는 모두 시대를 앞선 튼실한 개발 전략이었다. 매킨토시 고가전략 고집 잡스는 트루 폰트(True Font)라는 컴퓨터 서체 기술을 응용해 모니터 스크린에 나타나는 화면 그대로의 인쇄가 가능한 레이저 프린트 기술을 직접 기획했고 이 때문에 전자출판 시장을 새롭게 개척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획기적인 GUI 기반의 매킨토시 운영체제에 만족하지 않고 워크스테이션용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유닉스 기반으로 재구성하는 버전 업그레이드 작업을 AT&T와 함께 기획했다. 이 3가지 전략을 애플에서 지속적으로 밀어부쳤다면 마이크로소프트의 사업 계획은 훨씬 어려운 장애물을 만났을 게 자명하다. 잡스가 사라지자 애플의 존 스컬리 대표와 이사회는 매킨토시 고가전략을 고집하면서 보급형 Apple II 컴퓨터 판매에 매달리게 된다. 잡스를 대신할 사람으로 프랑스 출신의 천재 프로그래머 장 루이 가세를 영입했다. 그는 애플 기술개발 책임자로 부임한 첫날부터 잡스가 기획한 모든 프로젝트를 중단시켜 버렸다. 가세는 또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라이센스화를 기획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하는 일을 그대로 따라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세 역시 지나친 독불장군식 업무처리로 경영진과의 불화 끝에 2년만에 애플을 떠나야 했다. 조타수를 잃어버린 애플은 하드웨어 다양화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매킨토시 2와 클래식 SE 등 여러모델을 출시했다. 하지만 매킨토시 운영체제가 88년 6.0으로 업데이트 된 이후 7.0이 나오기까지 4년이 흘러야했다. 컴퓨터의 핵심 기술인 운영체제 개발을 소홀히 하면서 값비싼 하드웨어만 찍어내는 사업모델은 결국 애플이 여타 컴퓨터 제조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회사로 전락하게 하는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잦은 경영진교체 등 위기 애플은 90년대 초까지만도 여전히 전세계 2위의 하드웨어 제조사였다. 90년 애플의 시장점유율 12%에서 5%로 하락했지만 전세계 컴퓨터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해 수익은 오히려 증가하는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애플 경영진의 오판은 더욱 깊어만 갔다. 결국 애플은 잡스를 몰아낸 존 스컬리 대표를 92년 실적책임을 물어 해임했다. 그 뒤를 이어 취임한 마이클 스핀들러는 고가정책을 포기하고 다른 컴퓨터 제조사들처럼 저가 경쟁을 시도하다 회사의 적자구조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고 말았다. 스핀들러는 또 일부 이사진들과 함께 애플 매각을 시도하다 2년 만에 불명예 퇴진당했다. 94년 애플은 길 아멜리오를 대표로 영입했다. 2년 만에 3번째 대표로 등장한 아멜리오는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기 위해 대대적인 감원과 긴축재정을 시도했다. 동시에 차세대 제품개발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플의 주가는 거의 휴지조각 신세로 떨어지고 있었다. 잡스가 떠난 이후 10년 동안 애플의 사업전략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제의 테크놀러지를 오늘의 가격으로 팔고 미래에도 계속 그렇게 해야한다." 다시 말하면 충성심 높은 맥 사용자가 맥을 버리고 PC로 옮겨가기 전까지 최대한 울궈먹자는 것이었다. 한때 진보적인 도전정신과 아티스트와 같은 창조력을 내세우면서 컴퓨터 선도기업에 올라선 애플이었지만 구태의연한 사업 전략과 관료주의의 늪에 빠져 문닫을 위기에 처하고 만다. 잡스 없는 애플이 쇠락의 길을 걷는 사이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현상이 나타났다. 애플 광신도의 출현이었다. "혁명적인 신제품과 사용자 편의성"에 반한 애플 컴퓨터 사용자가 바로 그들이었으며 이는 스티브 잡스가 뿌려놓은 씨앗에 의해 잉태된 현상이었다. 디지털 세상이 마이크로소프트란 슈퍼 파워에 장악되면서 이에 반한 소수파(애플 사용자)의 결속력과 불완전하고 복잡 난해한 컴퓨터에 대한 반발 심리 탓이었다. 이들은 언젠가 잡스와 같은 백기사가 출현해 지구상의 모든 컴퓨터 사용자들을 구원해줄 것을 믿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집단 문화였지만 그들이 실체적으로 존재했기에 훗날 애플과 스티브 잡스는 기적과도 같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이정필 전직언론인 디지큐브대표 블로그 www.jpthegreenfuse.com

2011-06-03

[스티브 잡스 따라잡기-7] "앙팡 테러블"

오만하고 두려운 인물 IT 역사가들에게 비쳐진 스티브 잡스는 그야말로 극과극을 오가는 평가를 받아왔다. 최근 아이폰/아이패드의 성공과 시가총액 최고의 실리콘밸리 기업으로 등극한 애플의 반전드라마 때문에 잡스에 대한 가시돋힌 공격들이 많이 수그러들긴했다. 하지만 30년전 잡스는 화려한 언변의 실리콘밸리 록스타이자 동시에 영락없는 "앙팡테러블"이었다. 이같은 측면은 잡스의 매니지먼트 스킬의 일부이기도 하다. 오만방자에 극악무도한 성격의 소유자로 직원들에겐 두려움과 카리스마의 존재로 느껴졌을게 분명하다. 매킨토시 개발의 아버지와도 같았던 제프 러스킨은 81년 초대 애플 CEO 마이크 스캇에게 잡스가 매킨토시 개발에 합류해선 안되는 10가지 이유를 적어 보냈다. 1.회의시간에 제때 나타나는 법이 없다. 2.생각없이 일부터 저지른다. 3.직원들의 공로를 무시한다. 4.인신공격부터 한다. 5.마치 시혜를 배풀듯이 비상식적인 결정을 내린다. 6.직원들의 말문을 끊어버린다. 7.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8.권위만 앞세워 결론을 내린다. 9.혼자서 데드라인을 정해버린다. 10.책임감도 없고 성의도 없다. 이 메모 때문에 결국 러스킨은 해고 당했고 마이크 스캇 역시 잡스와 대립각을 세우다 밀려나고 말았다. 하지만 러스킨의 메모 내용 대부분이 사실이다. 잡스 혐오세력들에게 더 신나는 안주거리들이 많다. 애플시절 잡스는 새로운 직원을 인터뷰한답시고 대놓고 "섹스는 해봤냐 동정남 아니냐"고 묻질 않나 "마약은 해봤냐"고 까지 몰아붙였다. 직원들이 며칠밤을 세워 짜낸 프로그램을 자신있게 보여주면 "쓰레기잖아"라고 면박주기 일 쑤였다. 사내에서만 그런게 아니다. 경쟁자들과 경쟁제품을 공개석상에서 "멍청한 것들"이라고 비하하질 않나 "멋대가리라곤 조금도 없군"이라며 코웃음을 쳐버리니 놀부심보가 따로 없다. 10년전 아이북 신모델 개발을 앞두고 어느날 디자인팀에게 "색은 화이트야 화이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라고 했던 잡스가 한달후 똑같은 디자인팀을 모아놓고는 "화이트는 아냐…블랙이 최고야"라고 뒤집어버리니 얼굴이 두꺼워도 보통 두꺼운게 아니다. 한편 애플에서 쫓겨나다시피한 잡스가 절치부심끝에 세운 NeXT와 Pixar를 운영하면서도 달라진 점은 별로 없었다. 잡스는 여전히 거칠게 없었고 여전히 완벽주의자였으며 여전히 "앙팡테러블"이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자신이 하면 무엇이든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감과 무모함이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빌 게이츠와의 차이점 게다가 컴퓨터 세상은 소용돌이의 복마전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잡스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최고의 컴퓨터 개발"에 집중하는 사이 시애틀에 본사를 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동물과도 같은 감각으로 컴퓨터 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때부터 숙명적인 라이벌 관계로 발전했고 전세계 테크업계의 관전포인트로 부상했다. 잡스와 마찬가지로 게이츠 역시 신세대 젊은 경영인이자 컴퓨터 운영체제 DOS를 개발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벤처신화의 주인공. 하지만 둘 사이엔 큰 차이가 있었다. 잡스가 역작을 만들기 위해 예술가와 같은 혼을 불어 넣고 있을때 게이츠는 제아무리 잘 만든 컴퓨터라해도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깡통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게이츠는 자신이 만든 DOS가 모든 컴퓨터에 장착되는 것을 꿈꿨고 그러기 위해선 첫째도 둘째도 시장장악이 먼저라는 사실을 영악하게 수행 중이었다. 잡스와 달리 게이츠는 변호사 부모하에 유복한 성장기를 보냈지만 경쟁에선 절대 질 수 없다는 사명감 하나로 똘똘 뭉친 젊은이였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84년 잡스를 만나기 위해 애플본사를 찾아간 게이츠는 그곳에서 매킨토시를 처음 보고 놀라움에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개발한 DOS는 GUI기반의 매킨토시 앞에선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이츠는 그날 밤 잡스의 비위를 맞추며 붙잡고 늘어졌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매킨토시에서 작동하는 최고의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통사정을 한 것이다. 여유만만했던 잡스는 게이츠의 달콤한 아부에 넘어가 매킨토시 프로토타입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게이츠는 곧바로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에 착수해 "Windows"라는 운영체제를 만들어낸다. 매킨토시만큼 세련된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한 경쟁력을 지녔었다. 잡스가 NeXT Cube라는 역작을 만드는 사이 또 잡스 없는 애플에선 매킨토시만 믿고 신제품 개발을 게을리하는 사이 마이크로 소프트의 윈도즈 운영체제는 전세계 데스크톱 컴퓨터를 이미 장악해 버리고 말았다. 뛰어난 심미안 소유자 잡스에게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88년 NeXT의 신제품 개발와중에 IBM이 잡스를 방문했다. 당시 데스크톱 시장에서의 운영체제는 여전히 텍스트 기반의 DOS였고 잡스는 NeXT 제품을 위한 유닉스 기반의 GUI 운영체제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NeXT 운영체제는 객체지향형(Object Oriented) 기반 프로그램으로 역시 매킨토시를 개발한 잡스답게 테크월드를 선도하는 창조적인 작품이었다. 전세계 최대 컴퓨터 회사 IBM 이었지만 퍼스널 컴퓨터를 위한 운영체제가 없었기에 시장지배력은 약화되고 마이크로소프트에 질질 끌려다니는 신세로 전락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호주머니 바닥나겠다는 생각에서 IBM은 마이크로소프트와의 경쟁구도를 만들기 위해 잡스를 찾아온 것이었다. 당시 NeXT와 IBM이 연합했다면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즈 운영체제하의 데스크톱 시장은 상당히 다른 모습을 했을 것이란데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잡스에겐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나 애플을 창업한 이래 사업가로서 두번째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잡스는 IBM을 혐오했다. 그냥 강자가 싫었다. 스스로 강자가 될 수 있는데 굳이 쓰러져가는 공룡기업 IBM과 손잡을 필요가 없다는 자만심에 빠져있었다. 기라성 같은 IBM 임원들과의 연쇄미팅에서 잡스는 여지없이 자신의 오만방자함을 드러냈다. IBM의 제의에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으며 시간을 끌었다. IBM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잡스는 "10페이지가 넘어가는 계약서엔 사인할 필요가 없다"며 제안서를 돌려보냈다.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찬 것이다. 90년대초까지 잡스의 족적을 살펴보자면 이처럼 천방지축 개성이 스스로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고 평가하는 IT 역사가들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성격을 놓고 완벽주의자들의 일면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잡스는 끊임없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불태웠고 직원들에겐 누구도 넘볼수없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라고 독려했다. 특히 제품 디자인 관련해 잡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심미안을 소유했다. 이런 잡스의 DNA가 베어있는 애플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창업정신"으로 똘똘 뭉친회사라는 평가를 듣는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든 중견 사업가 잡스는 여전히 철부지 무모함과 배타적 자신감으로 인해 더 깊고 어두운 심연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정필 전직언론인 디지큐브대표 블로그 www.jpthegreenfuse.com

2011-05-20

[스티브 잡스 따라잡기-6] 터널 속에 갇혔으나

9년 만에 쫓겨나 칩거 85년 가을 스티브 잡스는 인생 최악의 시기를 향하고 있었다. 자기가 세운 회사로부터 쫓겨난 그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배신감과 갈기갈기 찟겨진 자존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애플 컴퓨터 설립 9년만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 그였지만 이제 겨우 30살. 어느 날 저녁 팔로 알토 저택으로 잡스를 방문했던 월스트리트저널 여기자의 글이다. "넓디 넓은 거실에 티파니 램프와 의자하나…어둠을 벗삼아 마루바닥에 주저앉은 잡스의 눈에선 역전 드라마에 대한 상상의 나래가 반짝이고 있었다." 잡스의 감정상태를 이보다 더 잘 보여준 글이 또 있을까. 분한 마음과 고독속에서도 "새로운 컴퓨터 회사를 만들어 세상을 놀래키겠다"는 말을 곱씹던 잡스였다. 잡스는 애플을 떠나자마자 보유했던 애플 주식 1장만을 남기고 모두 처분해 1억달러의 현금을 손에 쥐었다. 그 한장을 손에 쥐고 두고 보면서 복수의 일념을 불태우고 있었던 그였다. 안전한 금융회사에 "로토 당첨금"과 같은 돈을 맡기고 편하게 살 수도 있었다. 아니면 유명세를 이용해 실리콘 벨리의 전문 경영인 자리 하나를 노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더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겠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애플에 있으면서 오만방자의 극치를 떨쳤던 잡스는 회사를 떠났을 때 밥 노이스 데이브 패커드와 같은 실리컨 벨리 원조 사부들을 만났다. 인텔 창업자인 노이스박사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실패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제가 잘했어야 했는데 선배들의 기대와 후배들의 길을 모두 망쳐버렸다"고 자책했다. 이런 잡스의 모습에서 오만과 방자는 없었지만 그나마 어떤 실수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한 생각은 갖고 있었던 듯 싶다. 실수를 분석하고 느끼는 것과 그냥 아는 것엔 큰 차이가 있다. 잡스는 스스로의 궤멸을 주어담기에 바빴지 진정하게 거듭나기까지 거의 13년을 더 보내야했다. 애플은 당시 20억달러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다. 1억달러로 이런 회사를 이길 순 없었다. 9년전 워즈니악과 함께 무일푼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컴퓨터 업계가 더 이상 아니었다. 우후죽순으로 컴퓨터 제조사들이 생겨났고 마이크로소프트의 DOS 운영체제 프로그램이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었다. 또 IBM은 명실공히 업계 넘버 1. 이미 신생 디지털 테크놀러지 마켓은 고래등 싸움으로 번지고 있을때 잡스의 자본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명성 이용해 세력 규합 그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최대한의 세력을 규합했다. 우선 자신이 이끌던 매킨토시 팀의 핵심 하드웨어/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을 불러냈다. 86년으로 넘어가면서 잡스는 스스로 3000만달러의 자본금으로 NeXT란 컴퓨터 회사를 세웠다. 잡스는 당시 재계 큰손인 로스 페롯을 끌어들였다. 미국 대통령후보까지 나섰던 페롯은 잡스라는 젊은이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자신의 개인 재산과 함께 벤처캐피털을 끌어들여 단숨에 NeXT에 1억2000만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다. 두번째는 일본 가전 회사 캐논. 캐논은 자사가 개발중인 컴퓨터의 운영체제를 NeXT 라이센스로 일본내 독점권을 확보하길 원했다. 당시만해도 마이크로소프트의 DOS가 오늘날 윈도스처럼 독점적 체제는 아니었다. 군웅할거시대였다. 캐논은 일본내에서의 컴퓨터 업계 1위를 꿈꾸며 잡스의 NeXT에 1억달러를 투자했다. 묻지마 투자와 다를게 없었다. 잡스에게 인복까지 따라주었다. 공명과도 같은 인재가 제발로 찾아들어온 것이다. 명문 카네기 멜론대 컴퓨터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mach kernel" 개발팀을 지휘했던 천재 프로그래머 애비 타배니언이 NeXT에 합류했다. 매킨토시를 보유한 애플만 뺀 나머지 모든 컴퓨터 회사들은 차세대 컴퓨터 운영체제를 구상하고 있을때였다. 모두가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와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운영체제 개발에 열을 올리던 중이었다. 타배니언은 자신이 개발한 "마흐 커널"을 응용해 NeXT 운영체제를 디자인했고 이때 사용된 "마흐 커널"은 현재 최신형 애플 OS X의 가장 기초적인 프로그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로써 잡스는 매킨토시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운영체제 개발의 가능성을 손에 쥐게됐을 뿐더라 훗날 예상치 못했던 애플 복귀의 단초가 되는 무기를 보유하게 됐다. NeXT.Pixar 대표 맡아 NeXT 신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중 잡스에게 새로운 기회가 추가로 찾아왔다.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스타워즈와 인디애나존스 시리즈 영화로 유명해진 조지 루카스가 자신의 프로덕션 계열사를 매각하고 싶어했다. 그래픽 그룹(Graphic Group)이란 이름의 컴퓨터 그래픽/애니메이션 전문 회사였다. 루카스 감독은 당시 이미 특수효과전문회사인 인더스트리얼 라이트 & 매직이란 회사를 갖고 있었기에 또 다른 CG회사를 보유할 이유가 없었다. 또 당시만해도 컴퓨터 애니메이션은 하드웨어/소프트웨어의 제약 때문에 극히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었고 이 때문에 루카스는 회사를 매각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할리웃에서 명성을 날리던 루카스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기면서 첫부인과 이혼 소송에 휘말렸고 위자료를 지불하기 위한 상당한 현금이 필요했다. 이런 이유로 루카스 감독은 소리소문없이 아주 조용하게 회사를 매각하고 싶어했다. 잡스는 이런 상황을 간파하고 루카스의 첫 제의가 들어왔을때 간단하게 "노우"라고 답했다. 루카스의 그래픽 그룹은 당시로서도 지나치게 앞선 회사였기에 실리컨 벨리에선 누구도 선뜻 매입하려들지 않았다. 현금이 급해진 루카스가 전전긍긍하는 사이 잡스가 역제의를 했다. 500만달러. 루카스가 제시했던 금액의 5분의1이었다. 다급했던 루카스는 잡스의 협상력에 두손들었고 일사천리에 딜이 성사됐다. 잡스가 인수한뒤 이 회사의 이름이 바뀌었다. 오늘날 최고의 애니메이션 회사인 Pixar가 탄생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최고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회사는 아니었다. 잡스가 컴퓨터 에니메이션에 지대한 관심이 있어서 회사를 사들인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당시만해도 지금과 같은 강력한 하드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왠만한 회사들은 자사가 필요한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모든 회사마다 전산부가 따로 있었고 회사에 필요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직접 만드는게 보편적인 일이었다. 그래픽 그룹 역시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위한 전문적인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스스로 제작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아티스트들과 이들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기술진들이 따로 있었고 그들은 "RenderMan"이란 지구상 유일한 컴퓨터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를 보유하고 있었다. 바로 잡스가 탐낸 것이다. 잡스는 자신의 신종 컴퓨터에 RenderMan을 장착해서 애니메이션 전문 컴퓨터를 팔아야겠다고 구상했던 것이다. 잡스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 하나! 새롭게 출범한 Pixar에는 존 레세티란 애니메이션 프로듀서가 있었다. 디즈니의 제프리 카잔버그로부터 해고 당한뒤 낭인생활을 하던 그가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그래픽 그룹에 합류했었다. 존 레세티는 훗날 NeXT의 타배니언에 버금갈 정도로 출중한 애니메이션의 천재로 부상했다. 결국 잡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공명 하나에 봉추까지 낚아채고 비상을 준비했던 것이다. 애플을 떠난지 1년만에 잡스는 NeXT와 Pixar란 두 회사의 대표직을 맡으면서 여전히 실리콘 벨리를 대표하는 젊은 기업가로 유명세를 이어갔다. 이정필 전직언론인 디지큐브대표 블로그 www.jpthegreenfuse.com

2011-05-06

[스티브 잡스 따라잡기-4] 가장 불운한 사나이 론 웨인

실없는 웃음으로 가볍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날이지만 적어도 지구상의 한 사람만은 그럴 수 없는 날이다. 도박 천국인 네바다주의 파럼프라는 소도시의 구질구질한 카지노에 틀어박혀 하루를 소일하는 론 웨인(77)이 주인공이다. 요즘엔 특히 더 이날이 싫어진다. 35년전 만우절 그는 20대 초반의 두 젊은이와 함께 신생 컴퓨터 회사를 창업했다. 당시 800달러를 투자하면서 10%의 지분을 가졌던 웨인은 12일 만에 투자금을 회수하고 회사를 떠난다. 자금도 없이 컴퓨터를 개발하겠다는 두 젊은이의 야심이 무서웠던게 아니라 겁도 없이 대출부터 받아 사업하겠다는 발상에 가슴이 내려앉았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운명의 여신은 일생일대의 신중한 결정을 내린 웨인의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만우절만 되면 웨인과 함께 회자되는 말이 바로 'What if?'다. 웨인이 포기한 10%의 지분을 현재의 시가총액으로 환산하면 약 300억달러. 그가 포기한 회사는 애플 컴퓨터. 당시 그와 파트너 관계였던 창업자는 바로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다. "두 사람의 배짱에 겁이난 것은 아니다. 창업멤버중 재산을 소유했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만약 회사가 잘못되면 내 소유물로 차압이 들어올 것은 자명했다"는게 웨인의 변이다. 삶의 법칙이 돈으로 결정나는 것은 아니지만 웨인을 두고 지구상 가장 불운한 사나이라는 딱지는 너무나 당연하다. 잡스의 첫 직장동료 인연 세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어거지로 얻어낸 잡스의 첫 직장 아타리에서 부터다. 웨인은 76년 비디오 게임사 아타리의 중견엔지니어로 제품 디자인을 문서화하는 드래프트엔지니어(draftengineer)였다. 거지꼴을 하고 회사를 누비는 잡스와 밤이면 몰래 회사에 잡입해 공장을 살펴보던 워즈니악을 눈여겨 보던 웨인은 두 젊은이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던 사마리탄이었다. 게다가 웨인의 취미가 바로 컴퓨터였고 당시 스탠포드대학의 아마츄어 컴퓨터 동호회 'Homebrew Computer Club'의 회원이기도 했다. 이 동호회에서 누구보다 앞선 기술의 컴퓨터 보드를 들고나와 사람들을 놀래켰던 워즈니악을 기억했던 웨인은 잡스와 함께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다.컴퓨터 키트(76년 당시 완제품 개인컴퓨터는 존재하지 않았고 부품을 조립해서 간단한 디지털 명령어 수행을 테스트하는 수준의 키트)를 만들어 팔면 돈을 벌 수 있다고 떠든 것도 잡스였고 회사를 만들자고 바람잡던이도 바로 잡스였다. 실질적인 컴퓨터 디자이너 워즈니악은 잡스의 창업 아이디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실리콘밸리 최대 회사인 HP의 엔지니어였고 아버지 처럼 HP를 평생직장으로 여기며 은퇴를 꿈꿨다. 비스니스 설립 사부 역할 갈팡질팔 오리무중의 워즈니악은 웨인을 만나면서 맘이 움직였다. 웨인은 사업의 '사'자도 모르는 두 젊은이들에게 20년 연장자로서 사업 방법에 대한 훈수를 뒀다. 순간 워즈니악은 웨인이야 말로 자신들을 이끌어 줄 사부님이라고 여겼다. 결국 잡스의 창업아이디어에 동의했고 세 사람은 잡스의 집 차고에서 애플컴퓨터를 세웠다. 정말 만우절과 같은 창업이었다. 워즈니악의 자서전을 들춰보자. "잡스가 회사를 만들자고 했을때 웨인을 만났다. 그는 우리가 모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정말 놀라웠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연장자였던 웨인이 우리 둘사이의 심판 역할을 맡았다. 내가 컴퓨터 설계를 위해 차고에 있는 쪼가리 회로기판을 들고 집에가서 일한다고하면 잡스는 여지없이 '애플 컴퓨터의 재산을 맘대로 갖고 나가선 안된다'는 식이었다. 잡스의 어거지 생떼에 짜증이 날때면 단연 웨인이 중재에 나섰다. 잡스와 내가 충돌하는 것을 보면서 웨인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비슷한 일화가 떠오른다. 20대의 세르게이 빈과 래리 페이지가 인터넷 검색엔진 회사인 구글을 창업한 후 "연장자의 지도"(Adult Supervision)가 필요하다고 느껴 에릭 슈미츠를 영입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실리콘밸리의 최초 벤처 신화의 주인공인 잡스와 워즈니악 역시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웨인의 역할은 사실 유치원 아이들을 가르치는 수준과 같았다. 웨인은 "세사람이 모여서 컴퓨터 개발을 논의하며 회사창업이 필요하다고 한 것은 바로 나였다"고 말한다. 애플 컴퓨터 설립 신청도 애플 컴퓨터로 회사명이 정해지자 웨인은 뉴턴이 사과나무 밑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그림의 회사로고를 만들었다. 사실 회사 이름도 세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는게 없자 채식주의자였던 잡스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사과를 회사명으로 하겠다고 했다. 웨인은 회사로고 이외에도 회사운영계획서 파트너 지분 계약서 그리고 애플 컴퓨터 최초의 매뉴얼을 집필했다. 세사람의 사인이 들어간 서류를 들고 애플 컴퓨터 설립 신청을 했던 사람도 바로 웨인이었다. 자본금 2800달러. 잡스는 자신의 폴크스바겐 밴을 팔았고 800달러는 웨인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워즈니악은 오로지 기술만을 갖고 있었다. 회사가 만들어지자 마자 잡스는 세일즈에 나섰다. 샌프란시스코와 샌호세 인근 컴퓨터 애호가들이 자주 출입하던 전자부품센터 Byte Shop을 혼자 찾아간 것도 잡스였다. 그는 워즈니악이 개발한 초보적인 컴퓨터 보드 키트를 주인에게 보여주면서 완성된 컴퓨터를 공급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2시간에 걸친 구라작업 끝에 잡스는 생애 첫 비지니스딜을 성사시켰다. 50대의 주문을 받은 것이다. 문제는 부품조달. 최소 2만달러가 필요했다. 방법이 없었다. 차고속에서 세사람의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잡스가 말문을 열었다. 다시 'Byte Shop'주인을 찾아가겠다는 것이었다. 방금전에 제품공급 계약을 맺었던 사람에게 부품을 공급해달라고 청했다. 1만5000달러어치였다. 5000달러가 더 필요했다. 이번엔 은행을 찾아가 공급계약서를 보여준면서 5000달러를 대출받았다. "당시 결정 후회한적 없다" 이처럼 일사천리에 자금문제를 해결하는 잡스를 보면서 웨인은 경악했다. 잡스의 수완에 놀랬고 이후 실패에 대한 걱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놀랬다. 그는 또 Byte Shop 주인이 돈을 제때 지불하지 않는다는 소문까지 들었던 터였다. 지난해 샌호세 머큐리지와의 인터뷰에서 웨인은 "애플컴퓨터가 성공할 회사란 것은 알았지만 그러는 과정속에서 문제가 생겨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니 결정은 쉬웠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 창업 12일만에 투자금을 회수하고 회사를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로부터 1년후 잡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800달러 투자금에 1500달러가 더해진 수표와 함께 애플 컴퓨터 주식회사에 대한 모든 지분 포기 각서가 들어있었다. 웨인이 받은 2300달러는 당시 애플 주식으로 따지면 100만주에 달한다. 먼지나는 파럼프 트레일러 파크의 모빌홈에서 기거하는 웨인은 현재 정부연금으로 살고 있다. 38구경 총한자루를 준비한 것도 혹시나 도둑이 들까봐서다. 하지만 현재에 만족한다. "지나간 일 생각하면 무엇하나. 그때의 결정을 후회한 적은 없다."

2011-04-08

[스티브 잡스 따라잡기-3] "꼭 필요한 존재 되고 싶다"…해고됐다 복귀

병가 떠나며 직원에 이메일 지난 1월 스티브 잡스는 "건강상의 문제로 치료에 집중하기 위해 잠시 병가를 떠난다"는 이메일을 전직원들에게 발송했다. 언론에 공개된 그 이메일의 내용중 마지막 '…I love Apple so much…'가 전 세계 잡스 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가장 존경받는 CEO'에서부터 '미국 역사상 헨리 포드 이래 최고의 경영인'이란 현란한 수식어가 따라붙는 스티브 잡스의 단촐한 '애플 사랑' 한 마디에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깊은 감회를 느낄 수 있었다. 췌장암 후유증과 간이식 수술로 언제 그 명을 언제 달리할지 모르지만 꺼져가는 불꽃이 가장 화려하게 타오르는 것처럼 지금 잡스와 애플은 전세계 테크업계를 질풍노도처럼 휘젖고 있다. 포리스트 리서치의 조지 콜로니 같은 월가 분석가들은 애플의 매출규모는 전년대비 52% 성장한 것이라며 2-3년내로 3000억달러 매출을 넘어 엑손을 제치고 명실상부한 전세계 최대기업으로 거듭날 것을 예상했다. '파산위기' 불구 CEO 수락 앞서가는 회사에 대한 분석과 예상은 항상 장미빛이다. 반대로 97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 CEO로 복귀했을 때 월가 전문가들은 자신있게 애플의 미래를 '6개월내 파산'이라고 선고했다. 오죽하면 델(Dell) 컴퓨터의 창립자이자 CEO 마이클 델은 "차라리 회사를 정리해 주주들에게 조금이나마 현금으로 돌려주는게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독설을 뿜었을까. 그랬던 델 CEO는 지금 망해가는 회사 살리기에 안간힘을 다하고 있으니 역시 세상 오래살고 볼 일이다. 잡스의 애플 복귀도 사실 애플 이사회가 처음부터 원한 것은 아니었다. 심폐소생에 의존하는 회사를 살려내기 위해 사방팔방 적합한 CEO 를 찾아봤지만 실리콘벨리 사정을 파악하고 있는 능력있는 후보들에게선 모두 "미안하다 못하겠다"란 답변만 들어야했다. 모두가 애플의 사망선고를 기정사실화 할때 스티브 잡스가 돈키호테처럼 용감무쌍하게 뛰어들었다. 구조조정.신제품 개발 승부 실제 애플의 유동성은 당시 5개월 정도 버틸 운영비 정도였다. 잡스는 애플이 보유한 재산을 매각했다. 디자인부서가 보유했던 최첨단 시뮬레이션 장비까지 팔아 현금확보에 열을 올렸다. 여기에 50여종에 이르던 제품을 단 4가지 제품으로 초극단 다이어트를 실행했고 65%의 직원을 감원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당시 회사내에서 "I got Steved!"란 유행어가 나돌았다. "나 짤렸다"는 의미였다. 잡스는 85년 자신이 스카우트한 존 스컬리와 이사회에 의해 불명예 퇴직하면서 복수의 일념으로 보유했던 주식 단 1장만 남기고 모두 팔아치웠다. 주식 한장 남긴 이유는 나중에 애플보다 더 큰 회사를 만들어 성공해서 그 주식을 보며 비웃어주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었다. 이후 넥스트(NeXT) 컴퓨터 회사를 설립하고 조지 루카스로부터 컴퓨터 에니메이션 회사 픽사(Pixar)를 인수했지만 90년대 초반 잡스는 암흑의 시기를 보내야만했다. 넥스트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운영 체제와 독보적인 디자인의 컴퓨터까진 만들었지만 매출은 늘지 못해 만년 적자에 시달렸고 픽사에선 자신의 개인재산까지 거의 다 말아먹는 상황이었다. '인수하자' 제안엔 NO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잡스였다. 불행중 다행으로 픽사의 토이스토리(Toy Story)가 94년 기적적인 블록버스터 히트를 기록하면서 잡스의 운이 반전됐다. 하지만 여전히 넥스트는 밑빠진 독이었다. 운이란게 한번 들어오면 이어지는 속성이 있나보다. 96년 애플 길 아멜리오 대표는 차세대 운영체제를 잡스의 넥스트로 정하고 4억달러에 구매한다. 아멜리오는 친절하게도 잡스에게 회사고문으로 제품개발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잡스가 애플 CEO로 복귀할 때 언론은 그가 커튼 뒤에서 이사회를 공작해 자신을 불러들인 아멜리오를 내쫓았다는 식의 이야기를 유포했다. 하지만 2009년 오라클 CEO 래리 엘리슨의 비하인드 스토리 공개로 잡스의 애플 사랑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잡스와 엘리슨은 둘도 없는 오랜 친구 사이. 엘리슨은 97년 애플 CEO 섭외를 받고 있던 잡스와 함께 하와이 여행에서의 일화를 기자들에게 풀어놨다. 그는 잡스에게 "차리리 애플을 그냥 인수해버리자"고 제안했다. 망해가는 애플 이사회가 잡스를 대표로 맞으면서 지나치게 앞뒤재는 행보가 꼴보기 싫었고 잡스가 대표자리를 노리고 이사회를 공작한다는 언론의 소설이 싫었기에 애플을 인수하자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잡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내가 창업한 회사고 나를 내친 회사다. 애플의 회생을 위해 그들에게 내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게하고 하고 싶다. 무력은 안된다. 그래야만 내가 대표가 돼서 결정하는 모든 일에 도덕적 정당성이 부여된다." 잡스는 날개없이 추락하는 애플을 살리기위해 점령군이 아닌 창업가의 무한한 사랑으로 대표직을 받아들였다. 애사심.직원사랑 각별 82년 2월10일, 스티브 잡스의 야심작 매킨토시가 영글어지고 있었다. 지난 8개월 동안 애플 디자이너들의 목을 조르고 졸라 매킨토시의 최종 케이스 목업 디자인이 완성된 날이다. 수도 없이 잡스에게 퇴짜를 맞았던 디자인팀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샴페인을 직접 딴 잡스는 디자이너 한사람 한사람에게 손수 잔을 채워주고 있었다. 잡스는 개발팀 전원을 모아놓고 A4 용지 한장을 돌리면서 각자 사인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마지막으로 자신도 종이 한가운데 빈여백에 사인을 마쳤다. 잡스는 "맥 개발팀만의 비밀"이라면서 "이 사인은 역사적인 매킨토시 컴퓨터의 케이스 백패널 뒷면에 아무도 모르게 새겨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84년부터 89년말까지 생산됐던 매킨토시 클래식 모델 케이스 뒷면 안쪽에는 이처럼 아무도 모르게 개발자들의 사인이 새겨져있었다. 개발팀과 잡스만의 비밀이었다. 물론 개발자들의 사기를 위한 것이었지만 역시 자신이 직접 개발한 제품과 직원을 사랑할 줄 안 리더의 단면이었다. 오늘날 애플의 재건과 반전 드라마에는 한 경영인의 집요한 승부사적 기질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근성 여기에 남이 생각지못한 창조적인 발상의 조합이 어우러져있지만 그 어떤 경영자도 범접할 수 없는 각별한 애사심은 결코 가볍게 간과할 수 없는 잡스의 성공비결이다.

2011-03-25

[스티브 잡스 따라잡기-2] 안 되는 것도 믿게 만드는 '설득의 달인'

위대한 아티스트는 훔친다 전세계 최고의 CEO란 평가를 듣고 있는 스티브 잡스와 관련한 무수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특히 사람들을 설득하는 촌철살인의 직설적인 화법은 설사 남의 말을 인용한 것이라도 잊지 못할 잡스만의 독창성이 베어 나온다. 피카소는 "훌륭한 아티스트는 배끼지만 위대한 아이티스는 훔쳐낸다"고 말했다. 컴퓨터 여명기인 80년대 디지털 테크놀러지 역사속에서 하나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차용되고 발전하고 상업화 되는가를 논하면서 잡스가 인용해 유명해진 말이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잡스가 지어낸 말이라고 여길 정도다. 탁월한 설득화법이야 성공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때와 장소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맞춘 잡스의 한마디는 사람들로 하여금 꼼짝 못하고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만드는 마력을 갖고 있다. 진정 토론의 달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해서 등장한 말이 'Reality Distortion Field'다. 60년대 시작한 SF TV 드라마 '스타 트렉'에 등장하는 말로 현실과 상관없이 발생하는 알 수 없는 우주의 비밀 메커니즘을 지칭하는 뜻. 헌데 81년 초 애플의 차세대 컴퓨터 매킨토시 개발팀은 잡스의 언행을 지켜보면서 이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잡스의 말을 듣다보면 도저히 현실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결국에는 진짜처럼 들린다는 뜻으로 재해석된 것이다. 반대파도 세뇌시키는 재주 매킨토시 개발팀의 핵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했던 앤디 허츠펠트(현 구글 소프웨어 부사장)는 그의 회고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81년 2월의 어느날 잡스는 갑자기 매킨토시 팀을 모아놓고 신제품 출시가 82년 초로 잡혔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불과 10개월 남짓한 시간이었다. 매킨토시는 당시 컨셉만 잡혀있는 것이었지 시작도 못한 실정이었다. 헌데 10개월 내에 제품개발 완료라니! 이건 말도 안되는 지시사항이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잡스에게 다시 정확한 일정을 바로 잡도록 말해야 한다는 개발팀의 의견이 분분했다. 이때 의사출신 프로그래머 버드 트리블의 냉소적인 한 마디가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It's like reality distortion field' 잡스에게 아무리 말이 안되는 계획이라고 설명해봤자 말하는 사람이 도리어 설득당하고 만다며 그만두란 의미였다. 순간 모두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 때부터 잡스가 매킨토시 개발팀을 붙잡고 이야기하는 순간 팀원들은 '우리는 모두 잡스에게 세뇌 당하게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아무리 잡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려해도 잡스의 끊임없는 설득 역공으로 결국엔 그의 주장이 옳다고 맞장구치게된다는 것이다. 엔지니어 출신도 아닌 잡스가 어떻게 말도 안되는 논리를 갖고 팀원을 설득했는가는 여전히 미궁이다. 억지를 쓴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날고기는 전문가들이 잡스의 주장에 백기항복했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당시 매킨토시 개발팀을 이끌면서 "우리는 주당 90시간을 일한다 해군보다 해적이 되고 말겠다"고 자랑한게 잡스였다. 20대의 잡스는 거칠게 없었고 건방지고 제멋대로의 통제불능 망나니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킨토시 팀원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리더라고 잡스를 신뢰했고 제품 개발을 완료해 경쟁사들 보다 10년이나 시대를 앞서는 최고의 컴퓨터를 선보였다. 중학생때 HP사장 설득 설명이 안되는 논리를 어거지로 우겨 듣는 이들로 하여금 옳다 믿게 만드는 잡스의 재주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한 일화가 있다. 중학생 시절 잡스는 아버지에게서 선물받은 라디오 트랜스미터 장난감 'Heath Kit'에 심취했고 학교에서도 일렉트로닉스 특활반을 선택했다. 사실 공부하곤 담을 쌓고 있던 그였지만 특활반에는 큰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어느날 라디오 기기를 만들어 제출하는 과제가 떨어졌다. 당시에도 이미 다양한 조립품들이 학교 앞 업소 매장에서 팔리고 있었고 대다수의 학생들은 조립품을 사다가 완성시켜 과제물로 제출하곤 했다. 수일이 지나 한 친구가 잡스에게 "어떻게 하고 있냐"는 질문을 던졌다. 남들과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잡스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최고의 과제물을 준비 중이야"라고 대답했다. 큰 소리는 쳤지만 과제물 제출 시간은 다가오고 그는 궁리에 빠졌다. 그러다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옐로 페이지를 펼쳐놓은 잡스는 실리콘 밸리 최대 기업 HP(휴렛 패커드)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는 HP 창업자이자 사장인 데이브 패커드를 바꿔달라고 했다. 무슨일이냐는 비서실의 질문에 인근 공립학교 학생 대표 스티브 잡스라면서 일렉트로닉스 특활반 과제물을 위해 HP의 부품 공급을 상의하고 싶다고 대담하게 뻥을 쳤다. 말도 안되는 기적이 벌어졌다. 그에게 패커드 사장과 통화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패커드 사장은 "학생들에게 HP에 남아도는 전자 부품을 공급해 주면 전자 기기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회사에도 좋은 일이 아니냐"는 중학생 잡스의 설득에 넘어가 부품공급을 약속했다. 패커드는 훗날 어린 학생의 배짱과 용기 그리고 조리있는 말솜씨에 홀딱 반해 부품 한 박스를 전달했다고 술회했다. HP의 부품을 공수 받은 잡스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과제물을 제출해 친구들과 교사의 부러운 시선을 받았다. 어떻게 그런 부품을 얻었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잡스는 잔뜩 목에 힘을 주고 "엉…미스터 패커드가 직접 줬지!"라고 한마디 던졌다고 한다. 사실은 당대의 IT 업계 선구자 데이브 페커드가 10대 소년 잡스의 "reality distortion field" 공략에 넘어간 사건이었다. 아이팟 신화까지 이어져 잡스의 설득력이 가장 빛을 발한 사건은 그 유명한 iTunes 런칭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있다. 90년대 후반 인터넷의 광폭 파급은 Nepster(MP3 파일 공유사이트)에 의해 진행됐다. 불법음원 다운로드의 온상이었다. 순간의 클릭으로 최고인기 가수의 음악이 전세계 네티즌들의 하드디스크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순식간에 파산위기에 직면한 음반 유통사들은 모두 어떻게 위기를 돌파해야할지 몰라 허둥댔다. Nepster의 폐쇄는 쉽게 얻어냈지만 빙산의 일각일 뿐 이미 인터넷의 MP3 불법 다운로드사이트는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스티브 잡스는 2001년 아이팟이란 휴대용 MP3기기를 히트시키면서 유료 다운로드 아이튠스의 런칭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하나의 음원 파일을 등록시키기 위해선 음반사 프로듀서 작사작곡가 그리고 가수를 한자리에 모아 서명을 받아야 했다. 지칠줄 모르는 잡스의 설득공세에 각 파트의 사람들과 변호사를 한 테이블로 불러들여 서명을 받아낸 것이다. 애플과 스티브 잡스의 운명은 이처럼 잡스의 'Reality Distortion Field'라는 말도안되는 설파작업에 의해 서서히 바뀌기 시작됐다. 이정필 전직언론인 디지큐브대표 블로그 www.jpthegreenfuse.com

2011-03-11

[스티브 잡스 따라잡기-1] 황소 고집

실리콘밸리 30년 패라다임은 아이디어 기반의 신기술 상업화와 기술 발전속도의 함수관계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역사 속에서 수많은 회사들의 부침이 있었고 이중 벤처신화 1호 애플과 스티브 잡스의 ‘반전 드라마’는 할리우드도 상상 못한 초특급 블럭버스터다. 지난 97년 스티브 잡스가 임시 CEO로 재취임했을 때 애플은 파산일보 직전이었으며 이후 기적처럼 회사를 재건했지만 2007년까지만해도 운좋게 살아남은 하나의 컴퓨터 가전회사다. 하지만 오늘날 애플은 엑손(Exxon) 다음으로 최고 주식가치 기업이며 월가에선 조만간 트릴리온(Trillion) 달러 규모의 최초 회사가 탄생할 것을 의심치 않는다. "세상을 바꾸자"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세상을 바꾼 사람"은 흔치않다.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가 4번이나 세상을 바꾼것을 경험했다. 84년 매킨토시, 2001년 아이팟, 2007년 아이폰 그리고 2010년 아이패드… 안타깝게도 스티브 잡스는 현재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2004년 생존률 1% 미만의 췌장암 판정을 받고 죽음의 문턱에 다가섰지만 그가 바로 그 1%였다. 하지만 2009년 간이식 수술을 받고 신한부 생명을 통고 받았다. 필수 면역억제제를 복용하면 암세포 전이가 빨라지고 암을 잡으면 면역억제제가 무용지물이다. 잡스는 현재 세번째 병가를 내고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불꽃같은 그의 일대기와 애플의 반전드라마를 조명해본다. 미혼모에게서 출생 천성이 선한 스티브 워즈니악(애플 컴퓨터 공동창업자)은 샌호제를 떠나 캘리포니아 5번 프리웨이를 신나게 달렸다. 5살 아래 잡스가 오리건주의 사립대 리드 칼리지(Reed College)에 입학한다니 기쁜 마음으로 라이드를 해줬다. 머리도 식힐겸 잡스의 기숙사에 잠시 눌러앉았던 워즈니악은 본의 아니게 신입생 잡스의 불평불만 접수원이 됐다. 첫 강의에서 돌아온 잡스는 "공부가 싫다"는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공부를 배울 수 없다"며 투털댔다. 워즈니악은 "이거 대형사고났구나" 라고 훗날 회고한다. 잡스는 입양아였다. 그는 2005년 스탠포드대 졸업식 연설자로 나와 처음으로 자신의 출생비밀을 공개했다. 대학생이었던 생모가 임신을 하게되고 50년대 사회풍토상 미혼모의 출산은 너무나 고통스런 앞길이기에 출산과 함께 입양을 결정했다. 아기의 미래를 생각해 대졸 양부모를 찾았지만 아기가 태어나자 이들은 입양을 거부했다. 딸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대졸이 아닌 노동자 출신의 양부모를 찾았고 생모는 아기를 반드시 대학교육까지 시키겠다는 약속을 받고나서야 입양서에 사인했다는 이야기다. 양부모는 잡스가 주립대를 가길 희망했지만 꼭 리드 컬리지를 가야한다는 잡스의 고집에 넘어가 첫학기 등록금에 평생 저축한 돈을 털어넣었다. 잡스가 리드 컬리지에 들어간 이유도 별거 아니었다. 자신의 전공과도 상관없는 노벨상 수상 물리학 교수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 보고 입학을 결정한 것이다. 한 학기 마치고 휴학 한 학기가 지나자마자 휴학계를 낸 잡스는 학교를 떠나지 않고 도서실과 친구들 기숙사를 전전하며 '도강'을 즐겼다. 교수들도 알고 있었지만 왜 자신이 도강 학생인지를 펼쳐보이는 언변이 하도 기특해 그냥 내버려 뒀다고 한다. 잡스의 고집은 사실 어려서부터 유명했다. 말수적고 성적이 좋은 학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눈에 밟히지 않는 평범하면서도 감수성 예민한 학생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13살때 그는 처음으로 부모와 충돌했다.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온 그는 양부모에게 더이상 학교 다닐 수 없다고 선언해버렸다. 학교가 맘에 안든다며 왜 자신이 이 학교를 다니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를 조목조목 설파하고 있었다. 재미난 사실은 잡스의 양부모가 바로 이런 설득에 넘어가 10년 넘게 살았던 정든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순전히 잡스의 학교를 옮겨주기 위해서였다. 맹모삼천의 정성일 수도 있겠지만 양부모의 전언은 자신들이 잡스의 고집과 언변에 백기항복했다는 것이다. 도강생활을 청산한 잡스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워즈니악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당시 실리콘밸리 최대기업 HP의 말단 직원이었던 워즈니악은 '블루 박스'라는 최초의 전화해킹머신을 개발했다. 공짜로 국제전화 등 장거리 전화를 걸수있는 장치였다. 게임업체에 취직 잡스는 서서히 자기 생활에 질리기 시작했다. 어느날 갑자기 친구들 모인자리에서 잡스는 직장을 잡겠다고 선언했다. 설명이 필요없는 히피족이었던 잡스는 제멋대로 자란 머리 수북한 수염에 찢어진 청바지와 구멍난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는 또 사과와 당근만 먹는 채식주의자여서 목욕을 안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고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겐 정말 참을 수 없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헌데 첫 직장 인터뷰가 있다며 그가 찾아간 곳은 바로 비디오 게임의 선구자 ATARI. 70년대 중반 ATARI는 Pong이란 최초의 비디오게임으로 실리콘 벨리에서 큰 돈을 벌고 있었다. 잡스가 찾아간 그날 회사 로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친구들한테야 '인터뷰'한다고 뻥쳤지만 순전히 배짱만 믿고 무대포 심정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왠 거지 하나가 들어와 "JOB을 주지않으면 절대 나갈 수 없다"고 버티고 서있었다. 아수라장으로 변한 로비에 지나가던 사람이 있었으니 ATARI 창업자 놀란 부쉬넬사장이었다. 그는 잡스의 해프닝을 지켜봤다. 이때 다른 회사였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다. 부쉬넬은 "저 친구 눈빛이 보통이 아냐! 몬가 다른데 사고치지 않을 부서에 맡겨서 일거리 하나 줘봐"라고 직원에게 말하곤 사라졌다. 부쉬넬 사장은 나중에 잡스와 워즈니악에게 'BreakOut'이란 게임 개발을 맡기기도 했다. 잡스가 개발금 5000달러를 받고도 워즈니악에겐 700달러 받았다며 반반씩 나눴던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한편 부쉬넬사장은 이후 비디오 게임 사업을 접고 'Chuck E. Cheese's'란 피자 레스토랑을 시작해 크게 성공했다. 이정필 전직언론인 디지큐브대표 블로그 www.jpthegreenfuse.com

2011-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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